[조재휘의 시네필] 통일에 관한 정치적 사유의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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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비’(2017)와 ‘련희와 연희’(2017)라는 두 편의 영화가 있다. 전자는 157억 원의 제작비, ‘변호인’(2013)의 감독과 스태프진이 대거 투입된 블록버스터이다. 후자는 저예산 소품 수준의 독립영화로 물적 조건과 대중의 기대치는 상반되지만, 공교롭게도 같은 플롯을 공유한다. 분단 체제를 배경 삼아 벌어지는 동명이인의 탈북자와 남한 인사의 조우. 서로 다른 진영, 다른 체제에서 성장한 두 사람은 처음에는 이질감을 느끼며 경계하지만, 종국에는 화해함으로써 통일의 이상에 대한 영화적 대응물이 돼야 한다. 같은 이름에 다른 사람이라는 설정은 한 민족에 나눠진 국가라는 분단 현실에 대한 비유로서 작용한다.

남북 관계를 다루는 영화는 장르와 규모의 차이를 떠나서 좀처럼 인물과 서사의 전형성을 벗어나기 어렵다. 비슷한 인물 구도와 서사를 반복하며 강박적으로 민족주의적 수사와 감성에 호소하려는 상투적 수사(Cliche)의 박물관인 것이다. 분단 체제의 그림자를 훑고 지나간 뒤 자연스레 신파의 멜로드라마로 흐르는 이야기의 진부함은 반세기를 넘도록 해결되지 않은 남북 대치의 현실과 통일의 당위성 아래 너그러이 용납되고 정당화되지만, 정작 오늘날 한국의 분단 상황에 필요한 일말의 통찰을 던져주지 못한다는 아이러니로 귀결되고 만다.

첩보극의 형식을 빌린 양우석의 ‘강철비’는 일종의 사유실험처럼 북한 내부의 쿠데타라는 가상의 상황을 상정함으로써 당장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은폐된 현실의 잠재태를 끄집어낸다. 핵전쟁의 위기 직전,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 안의 첨예한 긴장감은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 그로 인해 촉발된 위기감의 고조 등 극장 밖 현실의 시사 이슈를 거듭 상기시킴으로써 관객 내면에 깃든 현실에 대한 공포, 정서적 리얼리티에 조응해 몰입감을 끌어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남북 분단 상황에서의 안보 이슈에 관한 영화인가. 엄철우(정우성)와 곽철우(곽도원) 간에 싹튼 우정과 형제애로 드라마의 초점을 기울이면서 영화가 포석으로 깔아놓은 국제정세의 위기는 단지 ‘우리 민족끼리’의 통속적 신파에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한 일차원적 배경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강철비의 얼개는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데프콘’의 배경 안에서 ‘의형제’(2010)와 ‘공조’(2016), ‘브이 아이 피’(2017)와 같은 동일 소재 영화들의 성공한 노선을 답습하는 바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이건 어디까지나 상업영화일 뿐이며 현금(現今)의 정치 상황은 단지 오락을 위해 억울하게 동원돼 소모되고 있을 따름이다.

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가 개인의 미시적 시점에서 분단 현실의 구체적 일상성으로 들어감으로써 남북 관계의 기저에 깔린 불신과 공포, 레드 콤플렉스의 징후까지 예민하게 포착해낸 반면, 거시적인 스케일을 조망하는 강철비에는 그런 유의 통찰은 얄팍한 조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일련의 대북 소재 블록버스터 영화들에는 다음과 같은 역설이 가능해진다. 정치를 직접 다루려는 영화일수록 정작 그로부터 읽어내야 할 정치적 의미와 사유는 증발하고, 컨텍스트의 껍데기를 들추어낸 이면에 오롯이 남은 건 단지 빈곤한 통속극의 매너리즘 뿐이라는 얄궂은 아이러니 말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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